지난달 3월 27일 서울대학교병원 치과병원 8층 대강당에서는 ‘수도와 정신건강’을 주제로 한국정신치료학회 2004년 제1차 학술연찬회가 열렸다.

국내외에서 많은 학술행사를 개최해 온 한국정신치료학회는 동양의 道와 서양 정신치료의 융합을 추구해온 학회.

특히 오는 8월에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국제학술대회인‘INTERNATIONAL FORUM ON TAOPSYCHOTHERAPY AND WESTERN PSYCHOTHERAPY’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국제학회에서는 道정신치료의 실제 치료사례들을 제시하여 서양의 저명한 분석가들에게 비판하고 토론하게 할 예정이다.

이번 ‘수도와 정신건강’에서는 치료사례는 다루지 않았지만, 道와 정신건강이란 주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의 학술대회 내용은 한국정신치료학회 측에서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불교수도와 정신건강: 정신치료자의 선 경험
정창용 (한국정신치료학회 이사장, 대구대동병원)

동양의 선각자들은 인간 고뇌에 어떻게 대처해 왔으며, 서양의 ‘정신치료’와 대비해서,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가.

선과 정신분석
선을 왜하느냐? 일체의 번뇌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야한다.

하지만 정신치료에서 ‘자기를 돌이켜 본다’는 것과 ‘선’에서 자심반조(自心返照)한다는 것 사이에는 방법이나 깊이에 있어서 아주 다른 면이 있다.

자칫 ‘비추다(照)’는 뜻을 돌이켜 생각하거나 반성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선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 생각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번뇌망상이 심한 환자는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사물이 일그러져 비치는 것과 같다.

정신분석적 치료는 무의식 속의 응어리들을 의식으로 끌어들여 자아가 이를 바르게 처리함으로써 착각을 벗어나게 한다. 자아를 강화하거나 성숙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 자아는 우리의 고뇌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 Freud도 불안을 ‘이상불안(異常不安)’과 ‘정상불안(正常不安)’으로 나누면서, 정상불안은 불가피하다 했다. 자아가 모든 불안을 막아 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자아의 성질
한 마음이 본능과 현실, 나와 남,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둘로 갈라져 싸워야 하는 우리의 통상적 자아로는 불안을 면할 도리가 없다.

나는 자심반조를 지속하는 가운데 통상적 자기가 ‘참 자기’가 아니라 하나의 투사 현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의 ‘나’는 내 마음속에 내가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살아서 움직이며 지금 막 그 그림을 그리는 자, 즉 ‘참나’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러한 자기는 항상 생각보다 한발 앞서 있기 때문에 객관화하여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눈뜨고부터는 ‘주객양분(主客兩分)’으로 인한 마음속의 시비가 많이 줄었다.

결론적으로 서양 ‘정신치료’는 자아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선(禪)은 그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인간 고뇌가 근원적으로 자아와 관계가 있음을 간파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포기하여 마음이 양분되기 이전의 ‘일심’(一心)으로 회귀함으로써 ‘번뇌본공’(煩惱本空)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참선보다 정신치료가 선행되면 더 좋은 사람도 있지만, 정신치료자가 선 수행을 통해 눈이 밝아진다면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정창용 선생님의 ‘불교수도와 정신건강’을 읽고
미산 스님(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전 참사람 수행원장)

정창용 선생님은 30여 년전 경봉선사로부터 참선지도를 받은 후 줄곧 참선수행과 정신치료 활동을 병행해 오신 살아있는 경험을 생생하게 말씀해주셨다.

화두삼매 체험을 통해서 선생님께서는 통상적 자기가 ‘참 자기’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통상적 자아를 정당화하는 서양에서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에 입각한 차원 높은 수행원리와 실제를 받아들이고 응용한다면 정신치료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을 공감한다.


유교 수도와 정신건강
박병탁 (박병탁 신경정신과의원)

원시유교의 수양방법은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실천적 방법, 또 하나는 학문적인 방법이다.

이 두 가지에 새로운 철학과 형태가 가미된 것이 성리학의 경사상(敬思想) 인데, 이것이 오늘 말하는 유교수도의 근간이라고 여겨진다.

경사상(敬思想)의 확립과 특징
경(敬)은 이천 정이(伊川 程頤)에 의하여 제시되고, 회암 주희(晦庵 朱熹)에서는 더욱 중시되었으며, 퇴계(退溪)는 이를 정리하고 종합하여 ‘경학(敬學)’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주자는 10여 년을 노․불에 관심을 가지다가 연평 이동(延平 李侗)을 만나, 일상생활의 일용인륜(日用人倫)을 중시하는 유학의 특색에 눈을 뜨게 되며, 노․불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주정(主靜)이 거경(居敬)으로 극복된 후에도 성리학자들이 마지막까지 정좌법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도학파 수양법의 기조에는 역시 정(靜)이 흐르고 있었다.

‘성학십도(聖學十圖)’와 경(敬)
‘성학십도’는 성리학(性理學)의 종합서로, ‘경(敬)사상’위주로 편술 하였다는 사실은, 성리학을 수양 위주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각도로 종합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퇴계의 실천 수양론
퇴계의 수양론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위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둘이 지행호진(知行互進)의 상수(相須) 관계임을 천명하였다.

‘유교 수도와 정신건강’ 논평문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

첫째, 제목과 달리 유교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인 성리학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 주자와 퇴계가 성리학 전반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셋째, 정신치료 특히 정신건강을 목적으로 할 때는, 성리학(그 중에서도 주리적 관념론)의 약점을 비판했어야 한다.

유교의 수양목적은 어디까지나 행위세계에서의 성정(聖情)한 행동인을 만드는데 있는데, 송대 성리학은 정태(靜態)에 빠져 행동력을 상실하여 외족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넷째, 경(敬)은 원시유교에서도 수양공부의 핵심개념이었다. 그러나 경(敬)과 의(義)가 직결되어야 하는데, 정(靜)적 수양을 강조하는 주리론자에 와서는 경(敬)에 치우치고 상대적으로 의(義)를 차치하는 경향이 있게 되어 행위세계가 소홀해진 것이다.

다섯째, 조선조 중기 관념적 성리학이 성할 때 이에 반발하여 소학공부를 유교의 진수로 들고 나온 학파가 있었고, 행동하는 지성이 모두 여기서 나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老莊思想의 修道와 정신건강
이죽내 (경북의대 정신과)

정신치료의 수단은 크게 치료자의 인격과 치료 기법이다. 인격이 근본이고 기법은 말초다.

정신치료자가 수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치료자의 인격과 관련된 청정심(淸淨心)을 위해서다.

노장사상의 핵심과 그 수도의 의미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학문을 하면 날로 지식이 늘어난다.

지식이란 분별지(分別知)다. 이에 반해 도(道)를 닦으면 날마다 분별지가 줄어 결국 ‘무위’에 이른다. 분별지가 없어진 상태를 무분별지(無分別知)라 한다.

무분별지는 주객일여(主客一如)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앎 그 자체’이다. 이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없는, ‘함(爲) 그 자체’만이 있는 상태다.

이런 함(爲)을 ‘함이 없는 함’(無爲之爲)이라 표현한다. ‘함이 없는 함’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다. 즉 자연(自然)스럽다.

수도의 방법
노자는 마음을 비우고(致虛) 고요함을 지킬 것(守靜)을 말하고 있다.

장자는 심재(心齋), 전심일지(專心一志), 좌망(坐忘) 등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장사상의 수도방법은 요약해서 허정(虛靜)이나 좌망(坐忘)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주객일여의 체험을 하려는 것이다. 주객일여의 체험에서 무위자연의 삶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적 해명
첫째 융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학(學)과 도(道)의 관계를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기’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의식적 자아가 분별지를 쌓아간다면, 무의식적 자기는 자기원형의 특징인 초월성에 의해 주객일여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를 융은 융합의 신비(mysterium conjunctionis)라 했다. 이 상태의 모든 행위는 자아가 없기에 ‘함이 없는 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을 담고 있는 치료형태가 변증법적 대화치료(dialektisches Verfahren)다. 치료자는 더 이상 치료하는 주체가 아니고 환자의 발달과정의 공체험자(Miterlebender)이다.

둘째 현존재분석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 이해는 존재자 인식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존재 이해란 주체의 존재가 객체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면, 존재가 존재를 이해하는 주객일여적 이해가 된다.

존재자의 인식이 분별지(分別知)라면, 존재의 이해는 무분별지(無分別知)다. 이런 상태의 모든 행위는 ‘함이 없는 함’이 된다.

이런 정신을 담고 있는 치료형태가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수행되는 존재개현적 치료(vorausspringende Fürsorge)이다.

결론적으로 노장사상의 수도는 ‘무위자연’이 되게 마음을 닦는 것이며, 정신건강의 궁극의 경지를 나타낸다.

방향에 있어 분석심리학의 ‘자기’가 되는 것, 현존재분석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과 일치한다. 방법은 허정(虛靜)이다.

이는 의미상 분석심리학에 있어 (원형적 작용의)체험 방법, 현존재분석에 있어 현상학적 방법에 상응한다.

이로써 노장사상의 수도와 이들 현대 심리학적 정신치료는 상호보완이 될 수 있고, 특히 후자는 전자에 의해 심화 발전될 수 있다.


‘노장사상의 수도와 정신 건강’에 대한 논평
이강수 (연세대 철학과)

노장사상의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바르게 파악하여 정신의학 및 심리학의 관점에서 잘 조명했다.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본다면, 첫째 분별지를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치열한 수양공부가 요구된다.

둘째, ‘이해(理解)’ 보다 ‘통(通)’의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념이나 이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 보다 수행(修行) 즉 실천의 측면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수도생활과 정신건강 가톨릭 수도생활의 관점에서
최시영 신부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소장)

수도생활의 영적 여정
첫째 무조건적 용서(無條件的 容恕)는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의 잃었던 아들은 배가 고파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제정신이 들었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다.

제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아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 순간은 동시에 그의 아들 됨의 신분을 온전히 다시 찾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둘째 회개(悔改, Conversion)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행위이다.

용서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실 때 건너는 다리의 이름이라면, 회개는 이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인간이 건너는 다리의 이름이다. 즉 동일한 다리의 두 가지 이름이다.

셋째 사랑은 수도생활 여정의 목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곳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완성되는 곳이다.

수도생활의 영적 여정과 정신건강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수도 생활의 영적 여정은 단절, 혼돈, 그리고 재진입의 과정을 밟는다.

첫째 단절은 수도생활을 선택하는 순간 그 사람은 예전에 익숙했던 곳을 떠난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의미를 주었던 모든 것에서 떠난다.

둘째 혼돈은 단절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또 다른 한 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외면하고 거부하였던 자신의 약함․결점․상처 혹은 죄스러움 등의 어두운 부분들이 드러난다. 혼돈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전으로 되돌아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나아갈 것인가?

셋째 재진입은 과거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변화를 향한 여정에 자신을 맡기기를 선택한다면 그 사람은 조만간 그 암흑의 시간을 건너서 새로운 가능성의 땅에 진입하게 된다.

재진입으로 다시 돌아 온 세상은 옛날 그대로의 세상이지만 다시 돌아 온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영적인 성숙과 인간적(심리적, 정신적) 성숙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신을 포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유로운 사람 즉 성숙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떤 연유로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점점 더 부자유스럽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 성숙과 영적 성숙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할 때 주어지는 선물(부수효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도생활과 정신건강
박용천 (한양의대 정신과)

수도생활의 과정이 정신치료의 과정과 유사하고, 특히 도(道)정신치료의 과정과 일치한다. 용서, 회개, 사랑의 과정은 수용, 통찰, 훈습의 과정과 일치한다.

심리학적인 설명인 단절, 혼돈, 재진입의 단계 또한 정신치료과정의 다른 표현이다. 정신치료자의 수도생활은 정신치료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수도와 도정신치료
이동식(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 동북신경정신과)

수도와 정신치료에 대한 관심의 배경
초등학교 입학 전후, 사람이 울고불고 싸우는 것을 보고 인생의 행(幸) 불행(不幸)은 감정처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한 데서 출발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멸시하고 일본이나 서양을 숭상(崇尙)하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서양의 정신치료를 공부하면서 동양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해서 동양사상을 공부한 결과 도(道)가 정신치료의 궁극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어, 도(道)와 정신치료(精神治療)를 융합(融合)한 도정신치료(道精神治療)를 부르짖게 되었다.

수도와 정신치료
서양의 정신분석도 이제는 사변적인 초심리학(metapsychology)보다는 임상적인, 경험에 가까운 것을 강조하고, 환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보다 공감(共感)이라는 주객일치(主客一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인자로써 환자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어, 동양의 인(仁), 자비(慈悲)로 접근해오고 있다.

치료는 공감적 응답(共感的 應答)이고 이것이 되려면 치료자의 마음이 걸리는 것이 없이 비워져 있어야 된다. 자비심(慈悲心)으로 차 있어야 한다.

정신치료 또는 수도(修道)의 궁극적인 목표는 착각(錯覺), 즉 갈등을 일으키는 투사(投射)를 없애는 것이다.

불교 수도(佛敎 修道)의 핵심(核心)은 지관(止觀) 즉, 불취외상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이다.

유교(儒敎)에서는 물구어외구제기(勿求於外 求諸己)다. 이 도적(道的)인 멈춤(止)이 정신분석에서는 피분석자의 자유연상(自由連想), 그리고 분석자(分析者)의 골고루 가는(evenly hovering) 주의(注意)에 해당된다.

도정신치료란 무엇인가?
서양정신치료는 19세기말 무의식(無意識)의 발견으로 시작되었으나 동양에서는 2500년 전부터 의식은 장식(藏識)에 저장되어 있어서 거기서 투사(投射)되어 나온다는 것이 확립되어 있었고, 치료도 이 장식을 정화하는 작업인 수행(修行), 즉 자기 마음을 보고 애응지물(碍膺之物)을 제거함으로써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정신치료(道精神治療)는 서양(西洋)의 정신치료가 도(道)로 접근해오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서양정신치료가 가고 있는, 가야 할 길을 밝혀주고 불필요한 논쟁(論爭)을 종식시키자는 것이다.

도정신치료(道精神治療)의 핵심(核心)은 치료자의 인격성숙이고, 그렇게 되려면 일거수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을 지배하는 핵심감정(核心感情)을 자각하고 벗어나야 한다.

핵심감정(核心感情)이란 대혜선사(大慧禪師)가 말한 애응지물(碍膺之物)이고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핵심역동(核心力動)과 연결된다.

핵심감정에서 벗어난 만큼 자비심이 생긴다. 치료는 자비심으로 치료가 된다. 동토(凍土)에 떨고 있는 환자에게 봄을 갖다 주는 것이다. 자비심이 봄이다.

‘수도와 도정신치료’에 관한 논평
이부영(한국융연구원)

한국 전통사상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여 현대 정신치료의 이론과 실제에 접목해오신 것에 깊은 공감과 경의를 표한다.

서양의 정신치료가 전체성(道)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동양의 도(道)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 자신의 정신적 전통에 있는 전체적 사고의 재발견이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심층적 치료 접근 자체가 ‘전체’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수도(修道)와 통찰정신치료는 공통된 목표를 지닌 듯 하다. 그러나 전통적 수도를 정신치료로 ‘개작(改作)’하거나 정신치료에 수도법(修道法)을 ‘이용하는 시도’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다만 한국의 정신과 의사나 정신치료자는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의 귀중한 전통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점에서 발표자와 뜻을 같이 한다.


전체토론

토론자 질문에 대해 이동식 선생은 ‘역사적 맥락에서 동양의 도(道)를 말했지만, 도(道)는 동양과 서양이 따로 없다’고 했다.

‘자아를 강화시키느냐 버려야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을 매개로 많은 토론이 있었다.

‘한국에는 융이나 프로이트만 있어야 하느냐’는 청중 질문에 이부영 선생은 ‘이동식선생의 경우와 달리, 국내외에 값싼 시도들이 많이 있는 현실을 우려한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