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60년 역사에 도전 - 도전과 응전의 60년 -
‘의약품을 통한 인류에의 봉사’라는 제약기업의 사명을 묵묵히 실천해 온 일동제약이 6일로 창업 60년을 맞았다.
삼양공사를 경영하던 松波 尹溶求는 1941년 3월 14일 극동제약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5월 6일 일동제약으로 상호를 바꾼 이후 기업정비령의 대상이던 대도제약, 대동제약, 수도제약 등을 흡수, 통합하여 사세를 확장시킨다.
해방과 6·25동란 등 한국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약품의 개발은 우리의 기술로’라는 기업정신 아래 신의약품 개발에 전력을 기울인 일동제약은 1958년 8월 국내 최초의 유산균제인 비오비타 과립과 정제를 생산하는 개가를 올린다.
비오비타의 개발로 1960년 유산균제의 제법특허를 획득했으며, 이어 비피듀스균과 낙산균도 자체 기술로 배양하는 데 성공한다.
비오비타 개발로 자신감을 얻은 일동제약은 수없는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1963년 9월 국내 최초로 활성 지속성 비타민인 ‘아로나민’의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1971년 일동은 미국의 와이어스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선진 제약기술의 습득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와이어스와의 기술제휴에서도 일동은 민족기업으로서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살려, 생산 노하우만 전수받고, 기초원료의 합성에서부터 완제품 생산에 이르는 전 생산공정을 순수 자체기술로 해결한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제산제 ‘암포젤엠’은 그 제조방법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제품이었으나, 알루미늄 괴에서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전 공정을 일동의 기술진이 무균시설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해 내는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같은 창의와 도전정신은 의약품 광고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광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의지의 한국인’ 시리즈는, TV 방영 최초로 기업의 이름을 딴 ‘일동스포츠’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스포츠와 연계한 광고 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일동제약의 아로나민골드는 국민영양제로 부각되며 국내 의약품 시장을 대표하는 제품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1976년에는 의약품 원료 합성공장인 청주공장을 준공, 이전하고 원료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1978년에는 이탈리아의 파미탈리아 칼로엘바사와 기술제휴해서 사미온, 아드리아마이신을 발매하고, 1981년엔 일본의 시오노기사와 제 3세대 항생제 시오마린을 발매함으로써 영양제 중심에서 차츰 치료제로 개발방향을 넓혀나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대망의 2백억원 매출고지를 정복한 1982년 6월, 일동중앙연구소를 설립, 신약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일동중앙연구소 설립 이듬해인 1983년 소화성궤양치료제인 염산라니티딘(큐란의 원료)의 제법특허를 획득한 데 이어 1986년 정부로부터 3년간 원료보호지정을 받는 개가를 올린다.
일동의 신약개발연구는 현재 항암제와 항생제 분야에서 괄목할 진전을 보인다. 1999년 2월과 2000년 7월 각각 美물질특허를 획득한 신규 하이브리드 안트아사이클린계 항암제 ‘하이루비신’과 신규 세파계 항생제 ‘IDC7181’은 신약으로의 개발이 크게 기대되고 있는 분야.
일동제약은 IMF라는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계열사 맥슨전자에 대한 과도한 자금지원과 지급보증의 여파로 1998년 9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돌입하게 된것이다.
일동은 워크아웃을 조기에 벗어나기 위해 전 임직원이 합심단결하여 전환사채 인수와 임금반납과 같은 희생을 감수하여, 워크아웃 돌입 2년 만인 2000년 9월 6일 자율추진업체로 선정되는 개가를 올린다.
일동은 워크아웃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의 경영위기 속에서도 1999년 12월 용인중앙연구소를 준공, 신약개발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올 1월 일본 스노우덴사와 향후 3년간 최소 165억원 상당의 생균제 수출계약을 체결, 생균제 생산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도 했다.
워크아웃 특별약정서 상의 상환스케줄에 따라 오는 2005년 3월까지 금융기관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 클린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당사의 임직원들은 새로운 각오로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사람으로 말하면 환갑을 눈앞에 두고, 엄청난 시련에 봉착했던 일동제약은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꾼 저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60년을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